대산문화

청靑노루

열망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꿈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 시의 사랑법

인문학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신의 악마들에게 형태를 부여해서 축사를 만든 작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①우리 공동체의 테두리와 깊이 ②언제든 다시 광장으로 ③국경을 지우기, 이주민을 환대하기 ④소수자, 현장, 연결

네, 나는 남한 작가입니다

무서움과 다정함 그리고 불쌍함

귀객(鬼客), 혹은 생의 이면(裏面)에 들린 자

성희는 몰랐겠지만

나의 해방촌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그저 지참금 때문에

의연한 연꽃의 작가

시대와 불화를 얘기하고 고달픈 삶을 노래하다

1920~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음식에 대한 몇 가지 소묘

①다시 봄이 돌아오니,겨울바다 ②분실,고래

①正午에 우리가 ②아무의 목소리

김포인과 꿩의 약속

첫번째｜먼 우레처럼, 두번째｜열등감에 대하여 세번째｜너무 빨리 온 미래 네번째｜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는 것

정치의 계절에 문학은 꽃 피는가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그때 소설을 포기한 것”

무진, 2008년 한국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창의적 배반일까, 무모한 이탈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중한 것이 있어

‘주의’를 거부한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

몽골어 운율에 실은 한국의 정조와 정신주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옮기다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등

2017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 등

내 글쓰기의 스승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글 오은 ㅣ 시인, 파스텔뮤직 수석기획자. 1982년생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유에서 유』 등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글 오은 ㅣ 시인, 파스텔뮤직 수석기획자. 1982년생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유에서 유』 등

매해 첫날, 나는 습관적으로 국어사전을 읽는다. 아무 페이지나 펼 쳐 오늘의 단어를 찾는 일을 몇 해째 반복하고 있다. 오늘의 단어라 고 칭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새해 첫날에 찾는 단어다 보니 그 단어 를 통해 나도 모르게 한 해의 운을 점치게 된다. 가장 먼저 세 권으 로 구성된 표준국어대사전 중 한 권을 고른다. 초성의 범위를 결정하 는 일이기 때문에 대충 진행할 수는 없다. 기역에서 미음까지, 비읍 에서 이응까지, 지읒에서 히읗까지 나올 단어를 미리 예측하는 절차 이기도 하다. 가령 기역에서 미음까지를 다루는 상권에서 ‘사랑’이나 ‘초록’ 같은 단어가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재작년에는 조심스럽게 상권을 골랐다. 펼친 페이지에서는 ‘곰비임 비’라는 단어가 나왔다. 곰비임비는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계 속 일어남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무렴, 그해는 정말이지 정신없이 바 빴다. 작년에 얻은 단어는 ‘미늘’이었다. 미늘은 “낚시 끝의 안쪽에 있 는, 거스러미처럼 되어 고기가 물면 빠지지 않게 만든 작은 갈고리”란 뜻이다. 낚시를 해본 적이 없으니 생소한 단어였다. 작은 갈고리로 단 어라도 많이 낚았어야 하는데 예년만큼 부지런하지 못했다. 올해 펼 친 페이지에서 건진 단어는 ‘도르리’다. 첫 번째 뜻은 “여러 사람이 음 식을 차례로 돌려가며 내어 함께 먹음. 또는 그런 일”이다. 두 번째 뜻은 “똑같이 나누어주거나 골고루 돌라 줌. 또는 그런 일”이다. 둘 다 좋은 뜻이다. 저 말처럼 올 해는 더 열심히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다.

초등학교 시절 찾은 단어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불현듯’이었다.
단어를 발견하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불현듯’의 어원을 알게 되자 이 단어는
더욱 소중해졌다. 그것이 “불 켠 듯”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실제로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늘 불현듯 찾아왔다.
나는 불현듯 시인이 되었고 불현듯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빅 데이터를 다루는 첫 직장에 불현듯 입사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국어사전을 좋아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좋은 친구는 바로 국어사전 이었다. 틈만 나면 나는 국어사전을 펼쳐 양 페이지에서 마음에 드는 단어를 찾았다. 그 단어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단어가 나오지 않으면 국 어사전을 접었다가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아버지가 젊을 적에 구입하신 국어사전은 두껍고 무거 워서 초등학생이 자유자재로 다루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두껍고 무거운 국어사전이 마냥 좋았다. 두껍고 무겁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도 찾아 나설 단어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 속에서 마음에 드는 단어를 찾은 날이면 다음 날이 기다려졌다. 국어사전에서 찾은 단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 내 다음 미션이었기 때문이었다. 배운 단어를 입 밖에 내봐야 진짜 내 단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지랑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다음 날이었다. 저 단 어를 어떻게든 꼭 쓰고 싶어서 그야말로 안달이 났다.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창밖을 가리키며 선 생님께 말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거 같아요, 선생님.” 선생님은 환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은아, 저건 아지랑이가 아니라 연기란다. 어디선가 장작을 때는 모양이다.” 내 볼은 금세 붉어졌지만, 그래도 아지랑이를 소리 내어 말한 것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다. 초등학 교 시절, 통신표에 적힌 무수한 문장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도 다름 아닌 이것이다. “주위 가 산만하나 어휘력이 풍부하다.”
초등학교 시절 찾은 단어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불현듯’이었다. 단어를 발견하자마자 숨이 턱 막혔

다. ‘불현듯’의 어원을 알게 되자 이 단어는 더욱 소중해졌다. 그것이 “불 켠 듯”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실제로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늘 불현듯 찾아왔다. 나는 불현듯 시인이 되었고 불현듯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빅 데이터를 다루는 첫 직장에 불현듯 입사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들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품고 왔던 단어가 내 인생에 결절(結節)을 이루고 전환점을 맞이하게 해준 셈이다.

2012년 12월,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고 내가 가장 먼저 구입한 것도 표준국어대사전이었다.
나를 위한 선물로 국어사전만큼 좋은 게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시를 쓸 때도 나는 단어 하나에서 출발하는 편이다. 사전 속에서 발견한 단어, 길을 걷다 간판이나 전단지에서 마주한 단어, 대화하다 무심코 튀어나온 단어가 내 시의 출발점이 된다. 그 단어가 문장을 이루고, 그 문장이 다음 단어를 불러들이면서 시가 서서히 골격을 갖추어간다. 문장들이 켜켜이 쌓여 겹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백지는 평면이고 문장은 추상이지만, 그것이 두 개 이상 만나 어떤 부피를 획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올 때 가장 설렌다.
국어사전의 가장 좋은 점은 펼칠 때마다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사전 앞에선 고작 한 단어일 뿐이다. 글 쓸 때마다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백지 앞에서는 늘 속수무책이다. 설레면서도 긴장된다. 기쁘면서도 당황스럽다. 백지는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과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거라는 불가능성이 모두 담겨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발을 들인 후 손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움찔움찔한다. 그래서인지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 온몸이 기진맥진해지곤 한다.
가만히 앉아 글을 쓰기만 했는데도, 칼로리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요즘도 틈이 날 때마다 나는 국어사전을 펼쳐 든다. 어른이 된 뒤로 어릴 때만큼 두껍고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 안에 분명 내 다음 시를 불러일으킬 단어가 있을 것이다. 글쓰기든 인생이든,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