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고희의 청년작가 한수산
글 하창수 ㅣ 소설가. 1960년생
소설 『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 『수선화를 꺾다』 『서른 개의 문을 지나온 사람』 『그들의 나라』 『함정』 『1987』, 대담집 『마음에서 마음으로』 『뚝』 등
한수산 ㅣ 소설가. 1946년생
소설 『용서를 위하여』 『까마귀』 『부초』 『바다로 가는 목마』 『사월의 끝』 『욕망의 거리』, 산문집 『꽃보다 아름다워라, 그 이름』 등
“몸살이 나도 글을 쓰면 거뜬해진다” - 고희의 청년작가 한수산
|
|
●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공들의 원혼이 서린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문제로 선생님의 장편소설『까마귀』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표하셨죠?
- 한국에선 2003년 여름에, 일본에서는 2009년에 출간됐습니다. 일본에선 『군함도』로 제목이바뀌었죠. 취재를 시작하고 출간되기까지 15년이 걸렸는데, 힘이 많이 들었던지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리는 일을 겪기도 했었죠. 다행히 다시 나긴 했지만요(웃음).
● 『까마귀』를 쓰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 무엇보다 필화사건 이후 일본으로 간 거겠죠(웃음). 일본에 민단과 조총련이라는 두 개의 한국이 있다는 걸, 어느 날 지하철에서 실감했어요. 하교시간이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조총련계 여학생들을 봤어요. 그때의 인상이 너무도 선명해서 처음엔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관계를 소설로 써보려고 했어요. 자료를 찾기 위해 도쿄의 헌책방들을 들락거리다가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책을 발견했고, 나가사키의 원폭피해자 가운데 한국인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방향이 바뀌었죠. 사실 취재를 하면서 너무도 벅찬 일이라 과연 쓸 수 있을까 두려웠는데, 1990년에 만난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의’ 회장님이 큰 산을 넘게 해주셨어요. 결정적인 힘이 되어준 또 다른 한 분은, 열다섯 살에 군함도로 끌려와서 해저탄광에서 일을 하다 몸을 다쳐 나가사키로 나온 뒤 조선소에서 일을 하던 중에 피폭당한, 소설에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서정우 선생입니다.
● 일본에서 『군함도』가 출간된 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 ‘국경을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평도 있었고, 기자로 은퇴한 노년의 여성이 ‘소중한 역사를 문학으로 남겨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준 적도 있었어요. 책이 출간된 뒤에 도쿄,나가사키, 고쿠라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강연요청을 받기도 했고, 판매실적도 그리 나쁘진 않은편이었어요(웃음).
● ‘군함도’ 이슈와 같이 일본과 관련된 미묘한 문제가 불거질 때면 많은 언론들이 선생님으로부터 의견을 청취하려고 합니다. 이 경우에 선생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지일파(知日派)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곤하는데요, 선생님께서 일본을 ‘알아간 과정’이 궁금합니다.
- 처음엔 4년씩이나 거주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질 못했어요. 그러다 알고 싶은 게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정치나 경제보다는 아무래도 문화 쪽에 궁금한 게 많았어요. 먼저 다도를 꽤 오랜 시간 배웠어요. 그리고 중국의 경극을 일본식으로 변형한 가부키를 공부했는데, 무엇보다 서민연극이란 점이 일본을 알아가는 데 도움을 줬어요. 다도가 정적인 문화라면 가부키는 요란스럽다고 할 만큼 화려하고 동적이에요.
● 『까마귀』에 얽힌 일화 중에, 7천장 정도의 초고를 모두 버리고 새로 썼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마음에들지 않으면 버리고 다시 쓰는 게 맞는 일이긴 한데, 워낙 많은 분량이라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닌듯합니다.
- 시간도 충분했고 취재도 많이 했지만 소설을 제대로 펼쳐내질 못했어요. 자료에 짓눌렸다고 할까요, 이것도 써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그런데 정작 아무 것도 쓴 게 없는 것 같은 딜레마에 빠져버린 거죠. 다시 읽어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세종대학교 국문학과)도 휴직하고 매달렸죠. 초고에선 등장인물 몇 개만 건지고 다시 쓰기 시작해 5천3백장으로 탈고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건 그 직후에 일어났죠. 뭉텅뭉텅 빠지는데 장티푸스에 걸린 줄 알았어요(웃음).
● 쓰시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림이 그려지네요.
- 밥 먹으라는 소리를 다섯 번쯤 들어야 식탁에 앉았어요.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땐 여덟 시간을 내리 책상에 붙어 있었죠. 일일이 자료를 대조하면서 써야하니까 시간을 많이 할애해도 매수는 늘지 않았어요. 후반부를 쓸 땐 벽에다 태극기를 달아놓기도 하고 (웃음) 기도문을 써 붙여놓기도 했어요. 예전 소설 공부할 때 황순원 선생님께 들었던 “소설은 ‘끝’자를 써야 끝이다”는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썼어요.
|
● 황순원 선생과는 각별한 사제지간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 선생님과의 일화가 담긴 에세이에는 “글을 쓴다는 건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그 무엇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일”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음에 쏙 드는 습작소설을 보여드렸다가 “이런 걸 쓰려면 소주나 먹고 말아라”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나중에 원고를 다시 보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치졸하게 번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얘기도 나오고요. 저는 이 두 개의 일화가 작가의 순결성·도덕성과 관련해서 이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 문제에 어떤 답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저는 ‘작가적 자존심’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가령, 백악관으로부터 만찬에 초대를 받은 윌리엄 포크너가 “밥 한 끼 먹으러 가기엔 너무 멀다”는 말로 거절한 건 작가의 자존심을 상징적으로드러내는 일화죠. 소설가는 아니지만 고갱의 경우도 예술가의 자존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합니다. 부인으로부터 “예술의 수도인 파리에 있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는 편지를 받고 고갱은 이런답장을 보내죠. “예술의 중심은 나다. 내가 있는 곳이 예술의 중심이다.” 표절은 작가적 자존심과관련된 문제라고 봅니다.
● 선생님께서는 많은 작품을 쓴 작가의 한 사람입니다. ‘소설의 진면목은 장편소설에 있다’는 말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런데요, 이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제가 잡기를 못해요. 고스톱도 못 치고 포커도 할 줄 모르고, 수영을 잠깐 배운 거 외엔 운동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니 그냥 글만 쓰는 거죠. 묘한 건, 몸살이 났을 때도 글을 쓰면 거뜬해진다는 겁니다. 예술혼이니 산문정신 같은 것보다는 그냥 ‘글쓰기가 몸에 좋더라’ 정도의 생활감각이 저로 하여금 계속 글을 쓰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웃음).
● 등단작인 단편 「사월의 끝」은 위수령이 내려 폐쇄된 강의실로 몰래 들어가 쓴 소설이라고,선생님의 에세이에서 읽었습니다. 노트 몇 권과 한 줌의 연필을 들고 학교 뒤편 철조망을 뚫고 들어갔다는 대목은 오금을 저리게도 하지만 무척 낭만적이기도 합니다. 사실, 질곡의 역사나 비극적인 인생사를 다룬 선생님 소설들에서도 이런 낭만적 풍모가 느껴지거든요.
- 당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느닷없이 군대로 끌려가는 바람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이 썩어서 곰팡내가 진동했던 기억이 나요. 저는 그때 영문과 3학년이었는데,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백단학회’라는 서클에 속해 있었어요. 야당 의원을 지낸 정범구(정외과) 씨도 멤버였죠. 하지만 당시 제 의식을 사로잡고 있던 건 ‘창조적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대운동장에 군인들이 주둔해 있던 학교로 몰래 잠입해 들어가서 소설을 쓰기로 한 겁니다. 처음엔 한 줄도 써지지 않았는데, 일주일쯤 뒤 단편 하나를 썼어요. 그 다음엔 닷새에 하나를 썼고, 사흘 만에 하나를 또 쓰고, 마지막 날엔 하루 저녁 단숨에 썼어요. 그 중 하나가 「사월의 끝」이었어요. 남달리 저한테 낭만적인 요소가 많다는 생각은 해보질 못했어요. 언젠가 “슬픈 소설을 읽는 게 즐거웠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의 낭만성은 누구나 있지 않나요?
● 많은 평자들이 선생님의 소설을 ‘산문시’라고 얘기합니다. 그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 서정적인 문체라는 얘기일 텐데, 소설 전체를 놓고 보면 서사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긴 이야기를 쓸 때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급급한데, 그러면서도 서정성을 유지하는 선생님만의 비결이 따로 있습니까? 타고나신 건가요?
- 미문을 꼭 써야할 필요는 없지만 유려한 문장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문장 공부를 해야 하는데, 문장 공부의 요체는 퇴고에 있어요. 저는 ‘노트 한 권에 시 한 편’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던 박목월 선생님으로부터 퇴고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황순원 선생님도 노트에 소설을 쓰셨는데 한 문장을 쓰고 나면 꼭 한 칸을 띄우셨어요. 고친 문장을 거기에 쓰는 거죠. 저는 학생들에게 “글은 쓰는 게 아니라 고치는 것이다. 이게 창조적 글쓰기(creative writing)다”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한수산 선생의 초기 작품들을 대부분 대학 시절에 읽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은 장편 『부초』와 두 개의 중편 「안개 시정거리」, 「회선」이었다. 특히 「회선」은 젊은 시절의 내게 큰 도움이 되어준 소설이었다. 당시 나는 스물네 살로 전방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작품집 『회선』을 친구가 보내주어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나와 비슷한 나이였고, 그가 가진 유사한 고민들을 나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 고민의 핵심은 “나는 남과 달라야 한다”는 데서 생겨나는 강박증이었다. 「회선」에는 ‘아라도’라는 섬으로 들어가는 서로 다른 연령과 직업, 사연과 목적을 가진 여섯 사람이 등장한다. ‘나’도 그 중의 하나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 결국 배가 돌아오게 되는데, 섬으로 들어가 ‘삶의 전환’을 꿈꾸었던 주인공은 회선하는 배 안에서 어떤 ‘터닝 포인트’를 감지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전환의 기회는 동일하게 주어진다. 인간이 공평하다면 이를 두고 한 말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회선」은 나로 하여금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소중한 존재였다. 한수산 선생을 만나러 가면서 내가 맨 처음 챙긴 게『회선』이었는데, 사인을 부탁하자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다”는 문장을 써주셨다.
|
● 흔히 선생님의 소설들을 3단계로 나눕니다. 1기는 개인적인 감성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등단작인 「사월의 끝」과 중편 「회선」, 장편「부초」, 「해빙기의 아침」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대하장편에 해당하는 『유민』과 제3국을 택한 반공포로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공 이야기가 담긴 중편집 『4백년의 약속』이 2기에 해당하는데, 역사적 서사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까마귀』로 시작되는 3기는 가톨릭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쓰신 『순교자의 길을 따라』로 이어집니다. 이걸 보면 선생님의 작가적 관심이 개인 → 사회 → 역사로 옮겨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칠순에 이르신 지금은 어떻습니까?
- 저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마흔 살 때 한 여성지에서 제게 연애소설을 부탁했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연애소설은 젊은 작가들이 써야지요.” (웃음) 개인적인 삶에 대한 관심사가 사회적 삶, 역사적 삶으로 옮아가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변화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60대로 들어서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 무렵, 늘 존경해오던 선배 소설가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소설가로서만이 아니라 평생을 언론에 몸담으면서 시대의 어려움을 치열하게 겪어낸 분이었는데, 그분이 불쑥 이러시는 겁니다. “내가 이제 칠십이 된다네. 이제 맞이하는 칠십에는 또 무슨 화려함이 있을까. 그게 막 기다려지기까지 한다네.” 70대의 화려함을 설레며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화려한 삶이구나 싶었죠.
● 2009년에 출간한 『순교자의 길을 따라』와 2013년에 나온 『꽃보다 아름다워라, 그 이름』은 모두 가톨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동안 칼럼이나 에세이를 통해 간간이 기독교나 기독교인, 혹은 종교적인 삶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선생님께 가톨릭은 어떤 의미가 있는 종교입니까?
- 사실 가톨릭에 쉽게 귀의하진 못했어요. 세례를 받기 직전에 포기한 게 여러 번 됩니다. 하지만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가톨릭은 저를 지탱해주었어요. 특히 필화사건을 겪을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죠. 저는 종교인이 되는 데 무슨 대단한 이론적 깊이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신의 사랑은 공부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에는 기도문이 많은데,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의미를 알 수 있는 것들이죠.
● 2010년에 출간하신 자전적 장편 『용서를 위하여, 그리운 이름 김수환 추기경』이 아마도 선생님의 종교적 인식이 가장 많이 녹아 있는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이 소설은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선생님의 개인적 삶이 씨줄날줄을 이루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목하게 되는 게 선생님께서 겪으신 아픔과 절망입니다. 이것은 표제에 사용되고 있는 ‘용서’라는 화두와 연결되는데요,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불리는 고통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당사자가 아닌 저로서도 ‘용서’라는 단어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절망을 준 사람들은 ‘멀쩡하게 잘’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용서는 피해자가 먼저 해야 한다”는 추기경의 말씀을 받아들이셨고, 그 실천의 의지를 글로 써내셨습니다. 제게 이것은, 가해자의 추인이나 인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신의 사랑’을구현하는 일로 보입니다.
- 책에도 썼지만, 일본에서 만난 한 프랑스 신부는 “용서는 신의 몫이다”라고 단언을 합니다.인간은 망각에 기댈 수밖에 없고, 기껏해야 분노를 희석시킬 수 있을 뿐이죠. 이 책이 출간되고 한 기자가 제게 물었어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초대를 하면 가시겠습니까?” 안 간다고 말했습니다. 제 솔직한 감정은, 두 사람이 평생 수도원에 가서 노동을 하며 참회를 한다고 해도 용서를 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책의 제목에 ‘용서를 위하여’라고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용서는 필요하다는 것 - 이것까지 부인할 수는 없어요. 사실,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위해 필요합니다. 용서를 하지 않고 분노와 한을 품고 살아간다는 건 스스로 사막이 되는 일이죠.
대담을 나누는 동안 나는 한수산 선생의 나이(칠순)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단추를 풀어헤친 푸른색 셔츠와 절대 동안의 위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아마도 그건 “몸살이 나도 글을 쓰면 개운해졌다”는 고백에 담긴 문학에 대한 열정과 “용서라는 말을 내 입으로 한다는 게 건방지다”는 말에 담긴 겸허와 솔직함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고희의 그에게서 청년을 본, 즐거운 환각의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