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표현의 자유와 비둘기 발

정신분석은 삶의 허약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논평자들의 세계

직접경험의 소멸과 한국문학의 행로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정 지 된 시 간 의 발 견

인도로 가는 길

바다를 닮은 소설가 한창훈

붕당을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그 인물들을 증언하다

매일 태어나는 신화들의 강남

연기자 겸 해설가이자 무대감독, 무성영화 시대 변사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1 시 2

매일 건강과 시 리처드 스콧 씨에게

앞으로도 궁금한 개구리들

하프를 잃어버린 시인들 카프카의 가르마 이것은 김밥이 아니다 기이한 나무를 찾아가는 길

대산초대석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글 신용목 ㅣ 시인. 1974년생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 등

김명인 ㅣ 시인. 1946년생
시집 『東豆川』『머나먼 곳 스와니』『물 건너는 사람』『푸른 강아지와 놀다』『바닷가의 장례』『길의 침묵』『바다의 아코디언』『파문』『꽃차례』『여행자 나무』, 시선집 『따뜻한 적막』『아버지의 고기잡이』, 산문집 『소금바다로 가다』 등

▲ 김명인 시인 © 운영자

1. 말하자면 이것은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가까운 바다는 성에 안 차 최근엔 새벽 해무를 밀며 네 시간 넘게 낚싯배를 타는 남자. 누가“거! 소주 한잔 합쇼” 부르면, 그득한 바다를 눈에서 거두고 끄덕이며 다가오는 남자. 소주잔을 들고 무람없이 바라볼 때, 그는 지극히 평범한 ‘낚시꾼’일 뿐이다.

정년 후 세 해 동안 무엇도 책임지는 일 없이 그야말로 심신의 홀가분함을 제대로 누리고 있습니다. 한가롭지만 한편으로는 그대로의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한 달에 두세 번 낚시를 다녀왔지만 걷고, 읽고, 쓰는, 세 가지 외에는 일체를 사양했던 나름대로의 칩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초한 소외의 일상’이라지만 자신의 시가 온전히 투명해지기 위해 ‘나’를 제대로 벗어버리는 과정일 것이라 덧붙이는 그의 날선 정신은 여전히 ‘심신의 홀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가끔씩은 ‘현실의 실체가 몽환에 겹쳐지는 비실체적 혼돈’을 겪기도 한다고. 한배에 오른 낚시꾼들이 끝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듯이 낚싯대를 드리고 앉은 듯 평온한 몸가짐만으로는 그가 짚고 있는 심해의 거친 향방을 사람들은 쉽게 짐작하지 못한다.

저는 척박했던 고향땅을, 광포하던 그 동해를 잊은 적이 없어요. 그 경험은 삶의 변두리를 운명처럼 골라 디딜 때에도 견디게 하였고, 하루하루가 그다지 막막했어도 참아내게 만들었지요. 제 문학의 부정성과 노력은 아마도 그런 뿌리에서 솟아났을 겁니다.

말끝에 “상한 뿌리로도 어쩔 수 없이 피워 올려야 하는 잎들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을 때,우리가 보는 것이 그가 호되게 피워 올린 잎들이란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치 낚싯대를 들어올리기 전까지 잔잔한 물결 아래 펄떡이는 것이 붉게 가라앉은 태양의 뜨거운 심장이 었다는 것을 모르듯이 말이다.

2. 그리하여 이것은 한 시인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 안암동, 그의 표현대로 ‘조교 책상’에 앉은 한 대학원생이 골똘하게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1976년 봄이었다. 시단은 관념성과 현학성이 표현의 묘미라는 찬사 아래 유행하던 때였
고, 대학원생 역시 한동안 시는 관념의 표출이라고 어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문장을 썼다.

우리의 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고유한 언어의 힘으로 환상적 세계를 부정하고 상상력을 통한 현실적 소망을 긍정하며, 구체적 체험의 고뇌와 환희 속으로 우리의 심장을 끌어내어 최후의 증언대 위에 세우고자 함에 있다. 우리의 이 가난한 심장은 여름날 내리쬐는 폭양과 겨울날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끊임없이 펄떡이며, 보다 더 철저히 시와 삶을 아파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의 언어를 끌어 안을 것이다.

우리가 ‘반시 선언’(《반시》, 1976)이라고 일컫는 문장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1973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인들끼리 어울리다 정호승,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생활과 실재에 충실하고 ‘위대한 단순성’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자는 취지에서 <반시> 동인을 만들었다. 동인지는 서점에 내놓기 무섭게 품절되었고, 동인이 주최한 강연회는 김우창, 한완상, 신경림 등 당대 최고 인사들이 참여하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삶에 다가가자는 것.
“날것의 시간들과 생생하게 부딪쳐가며, 그 감응으로 ‘나’와 ‘남’을 이해하는 일”이 곧 시이며,시와 삶이 함께 간다는 그의 믿음은, 당시 쓴 「동두천」이나 「영동행각」과 같은 연작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두천」은 스물세 살에 겪었던 교사생활을 되돌아본 시편이고, 「영동행각」은 고향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모티프로 삼았던 작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무엇이 그의 시와 삶을 이토록 질기게 동여맨 것일까?

시의 감동은 자기만의 시간을 제대로 겪으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열망 속에서 구체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은 한 사람이 간절히 염원하거나 진실로 소망하는 어떤 ‘진정성’과 마주치기 마련입니다. 이 ‘진정성’이 누구에게나 가식 없는 삶의 근거를 들춰보게 하지요. 그것은 자기를 반성하고 세계를 바꾸어가려는 주체의 의지에 연결될 뿐 아니라, 시대의 정신에도 가닿습니다.

시에 관한 내세울 만한 생각이 없다고 운을 뗀 그가 다만 ‘지향하는 것’이라며 꺼내놓은 말들은 저기 <반시>에서부터 이어져 현재 우리 시단이 새겨 반성하기에도 넉넉히 아프고 단단한 시론이었다. 그에게 시는 마음의 짱짱한 돌을 파 새기는 암각화 같은 것이어서 그 완성에 이르면,원하지 않아도 언제나 인간의 전부가 녹아 있는 깊은 심연을 그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내 시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동두천6」, 『동두천』, 1979)이라는 다짐이, “붐비는 가을의 허전함, 그런 것들을 꿰고/새 한 마리 날아간다, 질문을 넘어서”(「새」, 『푸른 강아지와 놀다』, 1994)라는 구절로 끝없이 나아가다, 어느 “신생의 그리움 품고 나무의/늙은 가지에 앉아/몸통뿐인 새가 울고 있다”(「여행자 나무」, 『여행자나무』, 2013)는 고백으로 깊어진다. 그러니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시원은 가파를 수밖에.

시기를 두고 제 시의 지향성에 어떤 변화를 느꼈다면, 그것은 ‘진정성’의 안팎과 같은 것이겠지요. 밖으로 맴돌던 예전의 사건들이 어느 사이 존재론적 사유로 바뀌어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시는 질문과 대답, 곧 자문자답으로 잉태됩니다. 질문하지만 이미 그 대답을 저의 물음 속에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 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질문은 질문을 넘어서는 물음인 셈입니다.

42년 동안이나 그의 시는 단 한 편도 허술함이나 흐트러짐을 보인 적 없이 특유의 긴장감과 깊이를 담보했다. 농담처럼 그 비법을 알려달라는 말에, 사전을 통해 말의 생래적 운명을 습득하라는 등의 요령에 앞서, 그는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생각 속에서 시를 놓지 않을 수 있다”는 당부를 먼저 꺼냈다. 까다롭지 않은 식성에 건강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만성적인 신장 기능 약화나 수면 장애 등을 겪는 것도 늘 기민하게 세계와 닿아 있는 그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증상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실로 그의 시는 ‘고통’에서 ‘고독’으로 이어져온 과정이었다. ‘고통’이 세계 속에 ‘자아’가 위치하면서 생기는 ‘외상’이라면, ‘고독’은 ‘자아’ 안에 세계가 위치하면서 발생하는 ‘내상’일 것이다. 묵묵히 삶의 낮은 자리를 향해 저인망을 내리는 것에서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오롯이 삶에 대한 대답으로 남겨놓기까지, 그의 시는 개인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조금씩 자기 안으로 삼켜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주기적 회기’를 거듭한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6·25 전란을 겪으면서 가족들을 반나마 잃어버리고 몰락해버렸던 가세로 인해 제때 상급학교로 진학 하지도 못했고, 피폐해버린 가계 탓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잦았습니다. 배고픔을 통해 본능적으로 일깨워진 유년시절의 허기를 경험했어요. 고등학교 일학년 가을에, 저는 생업을 결정해보려고 오징어 배를 탔었지요. 그때 채낚기는 고사하고 심한 뱃멀미로 쓰러졌습니다. 깨어났을 때는 이튿날 아침, 배가 항구에 닿으면서 비로소 되살아났어요.

그 일이 생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죽어도 뱃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까마득한 산맥을 넘어 도시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시인’이니 ‘문학’이니 하는 것은 그에게 생소한 말이었을 것이다. 궁벽하여 문화적 세례를 받을 수 없었던 것도 이유겠지만, 그가 의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저 가난과 허기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던 것이란 짐작. 만일 그랬다면, 그는 시를 쓰느라 지난 고통과 아프게 대면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러나 1차 입시에 실패하고 건강도 나빠져 재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2차로 합격한 국문학과에 계속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지훈 선생의 ‘시론’ 수업을 들으며 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어떤 운명임을 직감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직감은 저 흔한 성공의 기대나 확신에 찬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끝내 자신과 함께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도망갈 수 없으리라는 데 대한 자각은 아니었을까?

3. 그러므로 이것은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배고픔이 비유가 될 수 없겠지만, 혼자 남겨진 아이의 허기는 배고픔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낚시꾼으로 앉아서도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숙명의 바다는, 그에게 실존의 고통과 존재의 갈망이 함께 도사리는, 시의 영원한 원관념이었을 것이다. 시는 그를 휘황한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어둡고 차가운 기원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으니. 그는 삶의 가장 중요한 양식으로 시를 선택하였고, 시를 통하여 삶의 자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삶의 공정성을 생래적으로 의심해온 저 같은 사람에게 지금의 현실은 지극히 부조리하게 비칩니다. 시는 정치적인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내성적인 시인인 저는 지레 움츠리고 맙니다. 할 수 있다면 문학은 진실을 가리는 장막들을 걷어내는 데 일조해야겠지요.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성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고심할 일입니다.

‘글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덧붙이면서도, 세태와 정치에 대한 젊은 질문자의 조급함을 오래 쓰다듬어주듯 그는 낮게 말을 이었다. “시의 응전이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게 제 믿음의 한계”라고 스스로를 진단했지만, 세계가 이성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부정성을 드러내면서, 현실의 맥락과 미학을 적극적으로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된다”고 말하며 자신의 피상적 답변을 질타한 것과 달리, 그는 시를 통해 그 노력의 가장 구체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를 제시해온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현실을 깊이 천착하는 문학이 솟아오르기를 소망하는 자리에선 저도 열외가 아닙니다”라는 말투에 묻은 겸양을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름답다고말할 수 있다.

시의 감동은 자기만의 시간을 제대로 겪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열망 속에 구체화되는 사건입니다. 한 삶의 고유성은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희구하고, 그 삶을 진정으로 누리려 애쓰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획득된다고 할 수 있지요. 시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적인 사람들의 덕목을 저는 용기, 독립심, 상상력, 감수성 등이라고 꼽아봅니다. ‘용기’는 창신(創新)에 투신하려는 무모함을 부추기고, ‘독립심’은 나와 남이 차별되는 개성을 키우고, ‘상상력’으로 미래의 밭을 갈며, ‘감수성’으로 세상의 갈등을 끌어안습니다.

그는 완성되는 인간의 신화가 어디 있냐고 되물었다. 인간적 뮈토스는 끝끝내 그리워할 뿐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는 본향을 간직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마치 길 위의 나그네처럼, 우리는 도달이 없기 때문에 무수한 미지와 부딪치면서 어떤 종착을 향해 나아간다고. 마침내 그가 “여행자
의 시는 이처럼 온몸으로 부딪치는 삶의 총체성에 닿아 있고, 완성을 그리워하는 영원한 향수 속에서 고독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삶의 단단한 내벽을 한없이 쪼고 있는, 그의 시에 들린 마음의 가느린 정 한 자루를 보게 된다. 신화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말의 증명으로서 그의 시는, 서정시가 어떻게 마음의 신화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완성할 수 없는 형상을 끝없이 쪼는 것으로서의 시의 형상, 그 마음의 신화를 말이다.

모든 시편들로 펼쳐내는 시인의 궁리는 각각의 시편을 통과하면서 경험하는 시적 변신에의 꿈이 앞으로의 시작에도 긍정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말의 질서를 조직하고 완결하려는 시의 힘, 그것은 완성을 지향하지만 결코 완성으로 이끌리지 못합니다. 완전함이 없기 때문에 모든 시도들은 질서를 새롭게 상량하려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까요.

최근에 10행에 집중하는 시집을 엮었다는 그는 “죽음의 손길이 거쳐 간 거장의 손은 형태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 덩어리를 자유롭게 놓아준다. 그 터진 곳과 갈라진 틈, 존재의 본질에 마주한 자아의 유한한 무력함의 증인이 바로 최종작품이 된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형식을 넘어서는 시적 위의에 대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믿는 것은 그의 형식에 대한 주목이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고 삶의 실재와 밀착했을 때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효과에서 시작되었다는 데 있다.
마음의 신화가 시라는 간곡한 물질이 되어 누군가에게 건네질 수 있을 만큼의 크기. 그것을 그의 말대로 ‘호흡의 깊이’라고 해도 좋고 ‘파문의 넓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굳이 정지용과 김소월 등 거장들의 명편들이 10행을 전후했다거나 우리 고전 시가가 그만큼의 크기로 완성에 이르렀다는 것을 살피지 않더라도, 해와 달이 그리는 곡선처럼 삶과 생명을 실어 나르기에 좋은 수레한 칸의 크기를 발견하는 것도, 더 멀리 그 무게를 끌고 가기 위한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4. 그렇지만 이것은 결국 시에 관한 이야기다
조지훈 선생은 와병 중이라 강의를 나오지 못했고 대신 과제가 부과되었는데, 그 중에는 자작시 5편을 써 제출하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가 시에 빠져들게 된 계기였다니, 그의 습작기는 한참 늦게 시작된 셈이다. 그 자리에 선생이 몇 줄을 그어놓은 자신의 시가 놓여 있었고, 어떤 날은 직접 방으로 불러 소상한 말을 전하기도 했지만, 선생은 으레 자택 툇마루에 시를 올려놓고 가라고 일렀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제가 아는 시인이라고는 지훈 선생님 밖에 안 계셨으니, 그때부터 습작을 들고 선생님 댁으로 찾아뵙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2년여를 격주로 다녔으니, 오래 이어진 셈이지요. 그 시절 수많은 시들을 필사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추위 속에서 오 리나 되는 길을 땔감을 끌고 돌아오던 소년. 뜨락에 앉아 고픈 배를 늦가을 볕에 말리던 소년. 엄마를 기다리던 송천동 보육원과 오징어배의 멀미와 좌절과 함께 걷던 서울의 가파른 달동네까지 떠올리다 보면, 시로 놓인 그 종이 한 장의 무게를 선생의 툇마루는 어떻게 견디었을까, 짐짓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다움 속에 있는가 더러움 속에 있는가/용서 속에 있는가 칼 속에 있는가”(「동두천8」)하고 되뇌이듯, 그간 “무서워서 아무도 깨뜨리지 않으려던 저 깊은 침묵”(「동두천2」)을 와장창, 깨뜨리듯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펼쳐지는 사랑과 접히는 마음의 갈등’ 때문에 10년간 시를 접기도 했던 그가 1년간 교환교수로 머물며 미국 유타주 사막에서 보았다는 내면의 가득한 모래알처럼, 그 모든일들이 우주의 모래시계로 쉴 새 없이 떨어지며 우리의 시간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서정시를 마음의 신화에 올려놓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억하자. 그 신화는 끝나지 않는다. 이제 그의 시집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시간이다.